2018년도 영화인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를 보고 나서 실제 역사에서의 두 여왕에 대한 비교가 궁금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서론: 두 여왕의 시대적 배경
16세기 유럽은 종교개혁과 정치적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은 가톨릭과 신교(프로테스탄트)의 갈등으로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중심에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라는 두 여왕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친척이었지만, 종교적 입장과 정치적 정통성 문제로 평생 긴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이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대립을 넘어,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유럽 국제 정치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와 통치 기반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앤 불린이 처형되면서 그녀는 한때 ‘사생아’로 취급되었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복 누나 메리 1세(가톨릭을 신봉, ‘피의 메리’로 불림)가 사망하면서 1558년, 25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여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통치는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영국 역사에서 황금기로 평가받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절충안을 마련해 ‘영국 국교회’를 확립했고, 정치적으로는 의회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해군력을 강화하여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후계 문제와 정통성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 구도가 불안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는 엘리자베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3. 메리 스튜어트의 성장과 스코틀랜드 여왕 즉위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프랑스 귀족인 메리 드 기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생후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실제 정치는 섭정들이 수행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프랑스로 보내져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하면서 프랑스 왕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일찍 죽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고,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와 종교 갈등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가톨릭과 칼뱅주의 개신교 세력이 충돌하고 있었고, 메리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보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적 행보와 사생활 문제는 점차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특히 두 번째 남편 헨리 스튜어트(댄리 경)가 의문의 폭발 사건으로 살해된 뒤, 메리가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제임스 헵번(보스웰 백작)과 결혼한 사건은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그녀는 퇴위당해 영국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4. 영국에서의 망명과 엘리자베스와의 갈등
메리 스튜어트는 1568년 영국으로 도망와 사촌이자 혈통적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엘리자베스에게 큰 정치적 고민을 안겼습니다.
당시 많은 가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불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헨리 8세의 이복 누이 마거릿 튜더의 손녀인 메리 스튜어트가 더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여겼습니다. 가톨릭 교황청 또한 메리를 지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감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리를 풀어주면 가톨릭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고, 살해하거나 추방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메리는 영국에서 19년 동안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5. 가톨릭 반란과 암살 음모
메리 스튜어트는 감금 상태에서도 가톨릭 세력과 꾸준히 연계되었습니다. 1570년대에 들어 잉글랜드 내에서는 여러 차례 가톨릭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메리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섬벌랜드 반란’이나 ‘리들리 암살 음모’ 같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1586년 ‘배빙턴 음모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는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 했던 가톨릭 음모였습니다. 메리와 관련된 암호문이 발견되면서, 그녀가 직접 암살 계획을 승인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동안 망설여왔던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1587년, 엘리자베스 1세는 마지못해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명령에 서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본인도 같은 여왕으로서, 친척을 처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리의 존재는 이미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었고, 가톨릭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메리는 잉글랜드의 포더링헤이 성에서 단두대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당당한 태도로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녀의 처형은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가톨릭 국가들, 특히 스페인을 자극하여 이후 ‘무적함대 사건’의 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7. 두 여왕의 대립이 남긴 역사적 의미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대립은 단순히 개인적 질투나 왕위 경쟁을 넘어, 16세기 유럽의 종교·정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종교 갈등의 표상
엘리자베스는 프로테스탄트 영국의 상징이었고, 메리는 가톨릭 세계의 희망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곧 유럽 내 종교 전쟁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여성 통치자의 한계와 가능성
두 여왕은 모두 여성이었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는 여왕’으로 독신을 유지하며 권위를 지켰고, 메리는 개인적 연애와 결혼 문제로 정치적 기반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 지도자들이 직면한 사회적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영국 왕위 계승의 연속성
아이러니하게도,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된 후에도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후의 잉글랜드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사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이는 두 여왕의 대립이 결국 한 왕조로 귀결되는 역사적 역설을 보여줍니다.
8.결론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는 16세기 영국과 스코틀랜드, 나아가 유럽사의 중심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피로 맺어진 친척 사이였지만, 종교와 정치적 정통성 문제로 인해 치열한 적대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냉철한 현실 정치가로서 영국의 안정을 지켰지만, 메리는 비극적인 여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두 여왕의 이야기는 단순히 승자와 패자의 역사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종교와 권력, 여성과 정치라는 주제를 아우르며 후대에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메리가 남긴 비극적 이미지 모두 영국 역사 속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